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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찾아 떠나는 여행...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서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6/06/30 [13:54]

소 한 마리를 길렀다. 우직하고 느린 소 한 마리. 어느 날 일어나보니 소가 집을 나가고 없다. 울타리가 헐거웠나보다. 밥을 먹고 옷을 챙겨 입고 소를 찾아 나섰다. 어디로 갔을까. 첫 번째 그림의 게송은 이와 같다. '아득히 펼쳐진 이 세상의 초원에서 우거진 숲을 헤치고 소를 찾아 나섰다. 이름 없는 강을 따라가다가 첩첩 산중에서 길을 잃었구나. 힘은 빠지고 마음은 피로한데 소를 찾을 수가 없구나. 단지 들리는 것은 늦저녁 나뭇가지에서 매미 우는 소리뿐.'

▲ 이서영     ©브레이크뉴스

두 번째 그림에서 나는 헤매어 다니다가 드디어 소의 발자취를 찾아낸다. 이것만으로도 환호할 일이다. 세 번째 그림에서는 소를 만난다. 겨우 뒷모습에 꼬리만 보았지만... 네 번째 그림에서는 힘이 세고 사나워 다스리기 어려웠으나 결국 소를 잡는 데 성공한다. 고삐를 막 걸었다. 다섯 번째 그림에서는 코뚜레를 뚫어 소를 길들인다. 여섯 번째 그림에서는 드디어 길들여진 소위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차분해진 소 덕분에 피리도 불 수 있었다. 일곱 번째 그림에는 나만 존재한다. 소는 그림 속에서 아예 사라졌다. 여덟 번째 그림은 소도 없고 나도 없다. 채찍도 없고 코뚜레도 없다. 공 또는 무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다. 여기까지.

 

원래는 여덟 개의 그림, 팔우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팔우도는 불교의 것이 아니라 도가의 것이었다고 한다. 누가 그렸는지 알려지지 않았단다. 12세기 무렵 중국 송나라의 곽암 선사가 이 그림을 다시 그렸는데 여덟 개의 그림에 두 개의 그림을 더해 지금의 십우도가 되었다.

 

아홉 번째 그림은 본 고향으로 돌아와 강물은 고요히 흐르고 꽃은 절로 붉은 모습만이 그려져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달은 것이다. 나무는 나무이고 물은 물이다. 열 번째 그림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기 직전의 모습이다. 맨가슴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러 길을 떠난다. 술집에도 가고 시장에도 간다. 저잣거리에서 만나는,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깨달은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사랑이면 사랑으로 보이고 내가 미움이면 세상은 미움으로 비친다. 내가 부처면 모든 이들이 다 부처다. 깨달음이란 건 참 아름다운 일이다.


이 열 개의 그림들은 소와 나의 관계를 그린 것이다. 소는 나의 마음을 뜻한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마음을 스스로 조율하고 자유자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후 자유로워진 나의 마음으로 타자와 소통하는 과정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본래면목으로서의 나를 찾은 연후에는 나의 삶의 자족으로써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너의 손까지 잡아주는 우주적 존재로서의 성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덟 번째 그림까지는 나의 마음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곽암 선사는 깨달음을 깨달음으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그것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오쇼는 바로 이 점이 곽암 선사가 아름다운 이유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지점에 도달하기는 물론 어렵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멈춰서는 것은 옳지 않다. 나의 깨달음은 에고가 사라진 상태이지만 이것을 나누지 않고 혼자만 지니고 있다면 이것 또한 다른 이름의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부처도 깨달음을 얻은 뒤 40년 넘게 그 깨달음들을 대중에게 나눠주고 열반에 들었듯.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자신이 도달한 경지에 만족하여 거기에 안주하는 것. 이것은 흐르는 강이 아니라 고여 있는 연못의 평화다. 고여 있는 연못은 썩게 마련이다. 그는 이 고요한 연못을 아르하트라고 불렀다. 깨달음을 얻었으나 타인에 대해서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 붓다의 다른 가능성은 보디사트바인데 보디사트바는 자신의 깨달음을 나눠 주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법열을 기꺼이 나누어 가진다.

 

오쇼는 <십우도>에서 소를 에너지와 생명력, 역동성의 상징으로 파악한다. 소는 삶 자체인 것이다. 삶의 주체인 나, 소의 주인인 나는 그러나 소를 제대로 돌보지도 다루지도 못한다. 이는 질문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라고 오쇼는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지극히 근본적인 질문조차 내게 던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는 있느냐고. 가장 근본적인 것은 나 자신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나의 내적인 욕구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파악하기 위해 애쓰라고. 그것도 열심히, 땀 뻘뻘 흘리며 찾아보라고. 내가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한 연후에야 무엇이 나를 만족시키고 무엇을 통해 내가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될 것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그는 첫 번째 그림의 게송에 있는 '이름 없는 강'을 따라가는 모습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름 없는 강이란 기존의 관습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타자와는 다른 나만의 길, 내 스스로 없었던 길을 만들어 가는 개척자적 정신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 문명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우리는 고독을 두려워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시간을 갖지 않고서는 자신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인들인 우리는 감히 소를 찾아나서지 못한다. 혹여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 것을 미리 걱정하고 지레 겁을 먹기 때문이다. 모험심, 그리고 호기심이라고는 없이 그 자리에 붙박혀 감히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분리불안증을 일상으로 안고 사는 우리들은 그래서 일종의 우유부단한 환자들일지도 모른다.


위험을 감수할 것. 호기심을 회복할 것. 결정을 두려워하지 말 것... 결정을 두려워하는 심리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다. 실패하고 실수할까봐 두려우니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한 삶 속에는 신선한 호흡이 있을 수 없다. 창문도 없어 환기도 되지 않으며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비좁은 방안에 앉아서 바깥으로 나올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으니 길 잃을 가능성도 없다. 마음은 이렇게 현상유지에 안도하면서 박제처럼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이름 없는 강'을 따라가다가 '첩첩산중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고서는 내 안에 이를 수 없다. 일어나보니 집을 나가버린 소는 다름아닌 나의 마음이다. 내 마음이 내 안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나와 마음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분리된 마음이 나를 떠나버리고 나는 내 마음의 주인이 아니므로 세상의 일에 싑게 흔들리고 상처받는다. 그러던 내가 드디어 마음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리고 처음 경험하는 숲속에 들어보니 첩첩산중이요 그러니 당연히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가. 내 마음을 찾아 길을 나섰으므로 그나마 길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비좁은, 창문도 없는 방에 외로이 앉아 있지 않고 세상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실수할 위험을 감수하는 삶, 길 잃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삶만이 삶으로부터 응답받을 수 있다. 나는 길을 떠났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소를 찾아나섰지만 그래서 이름 모를 강을 따라가고 첩첩산중에서 길도 잃었지만 그리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늦저녁 나뭇가지에서 매미 우는 소리뿐'인 적막 속에 버려졌지만 바로 이 경험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이며 이 적막이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나는 이 적막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에게 귀기울이는 법을 배우고 매미 소리에 귀기울이며 바람이 스쳐가는 것을 바라본다. 만물이 저 스스로 있음을 조금씩 알 것도 같다. 하루 종일 헤매인 나는 피곤해 잠든 줄도 모르고 곯아 떨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좁은 방안에 갇혀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나도 모르게 하루 종일 노동을 한 셈이다. 잠이 꿀처럼 달다.

 

해가 뜨고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천신만고 끝에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뒤를 따라간다. 일단 찾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사실 소는 찾을 수 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어제와는 다른 나의 결정이다. 어제는 너무 막연하기만 했다. 소를 만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방향감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웬지 예감이 좋다.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느낌은 마음의 영역이 아니라 그 너머 영혼의 영역이다. 영혼은 느낌으로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의 느낌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어제만 해도 나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헤매어 다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나는 나뭇가지에서 우는 매미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었다. 비로소 느낌에 다가간 것이다. 이것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나다. 부정적 판단이라는 비좁은 방에서 나와 세상을 걸으니 조금씩 느낌이 살아나는 것이다. 아직 마음을 찾지도 못했는데 마음 너머에 있는 영혼이 조금씩 내게 다가오다니 예상하지 못했던 수확이다. 그렇게 걷고 걸어서 나는 내 마음을 결국 찾아 해지는 석양에 마음 위에 앉아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마음과 하나가 되어 진정한 나와 조우하였으므로 나는 이제 전인적 존재로서의 나 자신이 되었다. 팔우도까지 도달한 것이다.

 

여기에서 붓다가 설한 두 가지 가능성을 다시 짚어본다면 하나는 혼자만의 깨달음에서 멈추는 것, 다른 하나는 저잣거리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나의 깨달음을 함께 나누는 것.

 

아르하트가 될 것인지 보디사트바가 될 것인지는 나의 결정이다. 비좁은 방안에서 나와 마음을 찾아나선 것도 나의 결정인 것처럼. 오쇼는 말한다. 히말라야에 가면 여덟 번째 단계에 도착한 구도자들은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들은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고. 그러나 향기나는 꽃은 아니라고. 왜냐하면 그들이 이른 영혼 너머의 빛은 오직 자신만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혼자만 빛나는 삶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이 빛은 온 세상을 비출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비로소 전인적인 삶이며 꽃피우는 삶이며 향기로운 삶이라고. 단순히 침묵하는 삶이 아니라 저잣거리로 돌아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삶을 살자고.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물 한 모금 건네줄 수 있는 삶,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보여주는 삶. 십우도의 게송은 그렇다. 맨가슴 맨발로 사람들과 어울리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기쁨이 가득하다고. 마른 나무 가지에 꽃이 피어 활짝 피어난다고. 이것이 함께하는 깨달음의 진정한 기쁨이다. 소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다시 돌아온 나는 사람들과 나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또다른 수많은 나를 만난다. 도처에서 꽃들이 활짝 피어나고 있다.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책 읽어주는 여자 블루노트> 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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