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기획연재-대한민국 정당 계파 역사] ⑤민주자유당 外

여당 내 계파 갈등 등장..수습은 노태우 몫?

김상래 기자 | 기사입력 2014/09/18 [17:10]
브레이크뉴스 김상래 기자= 정치인들은 같은 당 내에서도 이념에 따라, 권력에 따라 모였다가 나뉘기를 반복한다. '계파 갈등'.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쉼 없이 나오는 말이다. 계파 갈등이란 단어 자체가 어감이 좋은 말은 아니나, 일당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이고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한 지붕 아래에 있다해도 100명이 넘는 의원들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법. 계파간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게 또 '정치'인 것이다. 이에 <브레이크뉴스>는 대한민국 정치 역사 속에 녹아있는 계파 관계를 되짚어 봤다.
 
▲ 노태우     ©브레이크뉴스

여당 내 계파 갈등의 배경
 
이전의 여당체제인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에서는 당내의 계파의 존재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노태우 체제하에서의 민정당은 종래의 여당에서 볼 수 없었던 계파가 만들어진다. 계파 형성의 이유는 모든 계파가 그렇듯이 ‘차기 대권’에 대한 욕심 이었다.
 
전두환으로부터 민주정의당 총재로 지목받은 노태우는 곧이어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다. 비록 역대 최저 득표율을 차지한 대통령이지만 여당의 위치는 유지한다. 노태우는 군인출신으로서 박정희, 전두환과 같은 계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전의 1인자들에 비해 강력한 세력을 과시하지 못한다. 당총재로 있었던 민주정의당 내에서도 전두환의 위세만큼은 아니었고, 대외적으로도 최저 득표율의 대통령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상황 때문에 노태우가 민정당 총재로서의 힘을 발휘 할 수 없었다. 전두환은 자신보다 앞서 군부정치가 이뤄졌던 박정희 정권에서 10·26사태가 일어났고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사실상 백지상태에서 시작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당내 인사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만을 배치한다. 따라서 신군부 시절의 민정당내에서는 다른 계파의 출현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과는 다르게 노태우는 전두환의 2인자로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의 시간이 흐르면서 전두환은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우를 하대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져 노태우가 몰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노태우는 처음부터 확고한 2인자가 아니었다. 2인자 자리를 놓고 노신영, 장세동 등을 견제했고 부단한 노력 끝에 전두환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될 수 있었다. 전두환의 체제에서 자리만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따라서 노태우의 취임 이후로도 5공의 상당수 인사들이 민정당에 남아 계파를 형성했다.
 
전두환 정권 말기 노태우와 경쟁하던 정호용은 노태우의 집권 이후 민정당 내에서 이른바 TK로 불리는 대구·경북지역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확실한 계파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노태우에게 적대적은 것은 아니었다. 노태우 본인 또한 TK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 내에서도 구TK와 신TK로 또 다시 나뉜다. 이에 노태우는 당을 자신의 확실한 지도체제하에 놓기 위해 이종찬과 3공화국 인사인 박준규 등 신 TK계와 서울·경기 지역 출신의 SK계를 중용해 상대에 맞불을 놓는다.
 
이 시기의 계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TK와 SK, 그리고 TK는 구TK와 신TK로 갈라지는 등 매우 복잡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들 간에도 한 가지 공동의 의식이 있었는데 이것은 김영삼에 대한 견제였다. 그에 대한 견제는  통일민주당과 한 배를 타게 되는 3당합당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 노태우와 김영삼    ©브레이크뉴스

 
3당합당, 더 큰 계파 갈등 속으로
 
전에 없던 계파갈등을 겪던 민정당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의 협의 끝에 합당을 이뤄 민주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한다. 하지만 집안 단속조차 되지 않던 상황에서 다른 식구와 한 지붕 아래서의 생활은 그리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노태우가 당내 계파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어려움은 당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태우가 취임하던 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여소야대 형태의 어려움 또한 겪고 있었다. 민정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원인은 호남에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 사건을 관련해 5공화국의 여당인 민정당은 호남에서 선택을 받지 못했다. 노태우측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초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접촉하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고 김영삼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 때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동교동계의 평화민주당에 의해 원내 3당으로 밀려난다. 김영삼은 김대중에 대한 경쟁심에 차기 대권을 위해 민정당과의 합당 협상에 응한다.
 
신민주공화당 또한 상황이 좋지 못했다. 김종필 총재의 고향이자 당의 표밭이라고 할 수 있는 충청지역에서 부진했기 때문이다. 이에 당내 계파인 구 민주공화당 출신들로부터 김종필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던 상황이었다. 김종필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의원내각제 개헌 시 총리자리를 기대하며 합당에 나선다.
 
각기 다른 상황에 있었던 3당은 최종적으로 합당에 이른다. 이후 당간부직과 내각에 3당 출신의 인사들을 고루 안배한다. 하지만 지난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세력이 힘을 모아 요직을 안배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결국엔 불균형이 일어나게 되고 각자의 소속으로 고스란히 나뉘어져 파벌을 형성하게 된다.
 
민자당의 갈등 구도는 민주계와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간의 대결이었다. 이는 대선 후보 결정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영삼이라는 확실한 구심점이 있던 민주계는 당연히 김영삼을 후보로 내세웠고 이를 막으려는 민정계와 공화계는 김영삼과 같은 계파내 확실한 리더의 부재로 갈팡질팡했다. 김종필, 이종찬, 김복동 등이 거론됐으나 가장 물망에 오른 인물은 박태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김영삼에 대적하지는 못했다.
 
민정계·민주계·공화계 등 파벌간의 권력암투는 김영삼의 민주계가 합당협상에서의 밀약한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거부해, 이에 민정계와 공화계의 협력으로 김영삼을 축출하려하자 더욱 심화됐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92년에는 3개 파벌간의 갈등이 절정이 달했다.
 
치열한 암투 끝에 노태우는 당총재직을 내려놓고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이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민정계 이종찬을 중심으로 새한국당을 창당했다. 또한 1992년에는 총선이 있었다. 후보 공천과정에서 수도권 지역에 공화계 인물들의 대다수가 배제됐고 이에 비주류가 돼버린 공화계의 수장 김종필은 공천 결과에 대한 최종 확정 협의 중 3분 만에 회의실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자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민정계와 공화계가 '후보 단일화 원칙'은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민자당은 대선을 목전에 두고 분열한 통일민주당의 전철은 밟지 않을 수 있었다.
 
노태우 시대의 여당에서는 이전 정권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여당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계파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그 원인은 전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당내 분열, 잔존 세력 처리 미숙, 리더십의 부재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노태우는 내부 단속은 덮어둔 채 여소야대 극복을 위한 3당합당에 합의하며 당 내부적으로는 더 큰 어려움에 빠진다. 그는 결국 김영삼에 밀려나고 정치적 중립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당에서 탈당하며 대통령 임기말을 맞이한다.
 
노태우는 임기 내내 계속되는 계파 갈등에 과감한 대처로 진압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2인자가 되기까지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을지 모르지만 1인자로 올라선 이후의 당내 파벌을 다스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성향에 대해 ‘이전 대통령과 달리 기존의 권위주의적 질서를 타파하려 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따르기도 한다.
 
scourge25@naver.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