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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Do It - 꼴린대로 해라!

공희준 Cinema Jockey | 기사입력 2002/05/05 [01:17]
{image1_left}늘씬한 젊은 여성 두 명이 지하철에 올라탔다. 미모는 그리 출중한 편이 아니지만 몸매 하나는 수준급이다. 전동차 안을 휘휘 둘러보는 것을 보니 앉기에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는 모양이다. 마침 내 옆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 이왕이면 두 여자 중에 좀더 어려 뵈는 축이 빈 자리를 채웠으면 좋겠다. 내심 속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할렐루야, 나무아미타불, 옴마니 팟메훔...이런 상황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종교에 의지하게 된다. 이 정도 소원수리는 신께서 너그러이 받아주시련만, 내 옆자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는 나이 먹은 여자의 권유에 어린 여자는 손사래를 치며 서 있겠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헛물만 켠 셈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반대편 문가에 기대선 늘씬한 두 여자의 굴곡진 바디라인과 탄력있는 각선미를 감상하는 것으로 새로운 즐거움의 대안을 발굴한다. 큰 키에, 햇볕에 약간 그을린 얼굴, 결정적으로 유니폼 비슷한 옷이 들어있는 반투명 비닐 쇼핑백. 아하! 두 여자 모두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나레이터 모델이다. 잠자리에서 두 여자의 모습이 괜시리 어른거릴 것만 같다. 그런데 갑자기 입이 간질거려서 미치겠다. 적극적인 작업까지는 못 가더라도 두 여자에게 나레이터 모델이 아니냐는 뻔한 질문을 던지고 싶은 나머지 혓바닥이 자꾸 내 통제범위를 벗어나려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casting director라고 쓰여진 명함이라도 하나 새겨 가지고 다닐 걸 그랬다.

열차가 서너 정거장을 달리자 이번에는 건장한 청년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우르르 전동차에 탑승한다. 다들 준수한 용모다. 내가 저 정도 상태만 됐어도 쇼핑백 들고 힘들게 서있는 나레이터 모델들에게 짐 들어주겠다는 얄팍한 추파를 던졌을 텐데 하는 청승맞은 회한에 갑자기 '엄한' 어머니가 원망스러워진다. 청년들 중에서 한 명이 도드라지게 눈에 익다. 누구더라. 맞다. 테란의 황제 임요환이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세 가지 종족 중에서 테란 밖에 조작할 줄 모르는 나로서는 tv에서 방영하는 프로게이머들의 경기에서 항상 테란족을 사용하는 선수를 응원한다. 예전에는 대다수 게이머가 통상적으로 저그나 프로토스로 경기를 했었는데 임요환의 깜짝 등장 이후 적지 않은 프로게이머들이 테란을 주종족으로 애용하고 있다. 후배 동생의 설명에 의하면 패치버전 1.08의 출시 이후 테란의 기능이 보강되어 이제는 테란을 선택해도 과거와 달리 프로토스와 저그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벌일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역시 임요환의 탁월한 무공이 배틀넷 무림을 평정한 결정적 수훈갑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image2_right}심증은 있는데 그 젊은이가 임요환이라는 물증이 없다. 일행 중에 하나가 키보드-상당수 프로게이머들이 손에 익은 전용 키보드와 마우스를 가지고 경기에 임한다-를 들고 있는 것이 정황증거이긴 한데 말을 붙이기가 영 쑥스럽다. 일행이 일제히 내리면서 무리 사이에서 "요환이형 낼 봐요"라는 굵직한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후회가 된다. 사인이라도 하나 받아서 조카들 주었으면 굉장히 좋아할 텐데. 머뭇거리며 망설이다가 테란의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목전에서 놓쳐 버렸다. 눈치 없는 신민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미행하는 황제를 알아보지 못하나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년들과 더불어 도우미들도 환승역에서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전동차에서 하차한다.

도우미도 없고, 요환이도 없고, 완전 김응용이다. 이번에는 무얼 할까 곰곰이 궁리하다가 약간의 면식이 있는 아가씨에게 시인 유하가 감독한 신작영화를 구경하러 가자고 전화로 제안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장고에 빠진다. 그쪽에서 흔쾌히 응하면 다행이지만, 거절할 경우 동네방네 개망신이다. 체면이냐, 실리(?)냐. 번민을 거듭하다 고뇌에 찬 장고 끝의 악수 대신, 그냥 돌을 던지고 불계패를 선언한다. 전화기 폴더를 닫은 것이다.

보람은 얻지 못해도 재미는 챙겨야 할 5월의 첫 주말을 지하철 안에서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다 의미 없는 공란으로 흘려버렸다. 무위도 이런 무위가 따로 없다.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다. 도우미 연락처도 확보하지 못하고, 테란의 황제 임요환 친필사인도 공중으로 날려버리고, 예쁜 아가씨와 영화를 볼 수 있었을 5%의 가능성도 그냥 유실했다. 그 중 하나만 시도했어도 3분의 1의 성공가능성은 보장되었을 것이다. 기실 3할 타자도 열 번 타석에 들어서면 일곱 차례는 헛방망이질만 하는 셈인데, 나는 배트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30%의 출루 가능성마저 제풀에 소진해 반납한 꼴이 되고 말았다.

차후에는 이번과 마찬가지로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게도 구럭도 모두 놓치는 황당한 경우를 스스로 자초하지 않겠다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되건 안되건 뭔가를 시도하겠다는 야무진 도전정신을 다져본다.

just do it! 직역하자면 "꼴린대로 해라"다. 꼴린대로 함은 주어진 선택의 기회와 권리를 회피하지 않고 행사하는 동시에, 결과에 부수된 책임을 기꺼이 감당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동안 개인의 주체적 결단과 자발적 선택을 존중하기 보다는 무리 틈에서, 패거리 속에서, 주류에 끼어 중간으로 행세하는 것을 현명한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다수에 무조건 편승하려는 소극적이고 소심한 인생관이 대중 속에 만연하다 보니 어느 정도의 역사적 정당성이 있었던 비지(비판적 지지)에 이어 급기야 마지(마지못한 지지)까지 바람직한 전략적 투표행위의 하나로써 장려되는 한심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꼴린대로 찍어라! just vote it.
당선 가능성이니. 전략적 투표니, 사표방지 심리니 하는 잔머리 섞인 행태는 과감히 물건 밖으로 흔들어 털어 내고 독자적 판단과 자율적 선택에 기초한 자발적 지지를 미래지향적 정치행위의 하나로 삼아 보자. 자발적 지지를 두 글자로 줄이면? 마침 오늘이 어린이날인 데다가, 야시시하고 민망해서 차마 더 이상 발설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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