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록으로 꼼꼼따져 본 12.12-5.18”

<지만원 박사 야심 리포트>5-18, 12-12 재평가 돼야한다<제1탄>

지만원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05/18 [08:07]
▲ 지만원 박사     ©브레이크뉴스
지난 5월7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대한민국재경경우회, 자유시민연대,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이 주최하고 애국단체총연합회가 후원하는 대규모 토론회가 있었다. 토론회의 취지는 왜곡된 “현대사를 재조명하자”는 것이었고, 토론회 주제발표자는 필자, 이주천교수, 법철스님이었다. 토론 주제는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5공의 핵심인사들이 대거 참여했고, 앞으로 이들은 역사재조명 추진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할 것으로 예상한다.
 
필자는 18만 페이지로 되어 있다는 수사기록, 그것도 5공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작성된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을 가지고 5년에 걸쳐 연구를 했고, 그래서 작년 10월에 총 4권, 1,720여 쪽의 다큐멘터리 역사책을 발간했다. 이 책을 보면 기존의 드라마 제4 및 제5공화국이나 영화 ‘화려한 휴가’는 황당한 무협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수사기록은 필자도 보았고, 판검사들도 보았다. 그러나 해석에 있어서는 필자와 판검사들 사이에 천지 차이가 있다. 필자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관심법 재판이요 인민재판이라고 결론지었다. 
 
1996-97년에 법관들이 쓴 판결문은 1980년의 판결들과 정 반대였다. 어느 정권 시절의 재판부이냐에 따라 판결이 뒤바뀐 것이다. 정권에 따라 판결이 뒤집힌다면 사법부의 판결들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역사학자가 나서서 역사를 써야 하는 것이다. 역사를 판사가 쓰고 정치인들이 쓰면 그 나라는 전체주의 국가이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이러한 당위성에 발맞추어 2004년10월3일, 대법원은 수사자료를 공개하여 역사를 쓰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정권에 따라 판결문 달라
 
▲수감됐던 전두환
1980년, 한국의 법관들은 정승화에게 내란방조죄를 선고했다. “김재규가 범인인줄 알면서도 기회주의적 발상으로 김재규의 범죄를 은닉하고 김재규의 뜻에 따라 국방장관의 소관사항인 병력동원을 월권적으로 주도하면서까지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1980년의 법관들은 김대중에게도 내란음모죄를 선고했다. “80년5월의 학원소요사태는 김대중이 10.26 이후의 국가체제 공백기를 악용하여 북한 측 불순분자들과 연합하여 최규하 정권을 무너트리고 정권찬탈 목적으로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것이다. 1980년의 법관들은 5.18광주사건을 반정부 폭동으로 규정했다. “5.18은 김대중으로부터 사주와 자금을 받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 등이 자금을 살포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유발하고, 홍남순 김성용 등 반체제 인물들이 이에 편승하여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과도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폭도들을 더욱 선동하여 방화, 파괴, 살인, 강도 등의 행위를 저질러 광주를 무정부사태로 만들고 계엄군에 총격까지 가한 폭동”이라는 것이다.
 
그 후 세상이 바뀌자 1996년의 법관들은 헌법이 명시한 일사부재리 원칙을 무시하고 정승화와 김대중과 5.18 광주사건 모두에 대해 재심절차 없이 다시 재판했다. 이들에 의해 김대중은 민주화의 화신으로 등극했고, 전두환은 무력으로 국권을 찬탈한 반란수괴요 광주시민을 학살한 내란수괴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1997년 4월 17일(96도3376) 대법원은 이런 요지의 판결문을 냈다. “5⋅18은 전두환 일당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해가지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압하여 권력을 행사하면서 내란을 목적으로 광주학살을 자행하였다.”
 
같은 사건을 놓고 1980년의 법관들과 1996년의 법관들이 정반대의 판결을 낸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일사부재리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는 재판을 두 번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1996년의 법관들은 이 헌법을 무시하고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특별법에 의존하여 1980년의 판결문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ys는 왜 갑자기 전두환을 감옥에 넣었나?
 
민주화투사라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자 그는 하나회를 정리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인기의 요체를 실감한 김영삼은 군사정권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인기는 더욱 올랐다. 민주화에 대한 막연한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김영삼은 “12.12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역사 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2.12 및 5.18 피해자들이 일어섰다. 1993년7월19일 정승화, 장태완 등 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장을 냈다. 12.12사태는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일으킨 군사반란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로부터 1년3개월10일 후인 1994년10월29일, 검찰은 12.12고소-고발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12.12를 “군형법상의 군사반란사건”으로 규정했고, 피고소-고발인 전원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했다. "12.12사건은 소장파 군부세력의 리더인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군권을 탈취하기위해 치밀한 사전계획 하에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승인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하고, 병력을 불법동원 해 군 지휘체계를 무력화시킨 명백한 군사반란 사건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 모두를 법정에는 세우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8명중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에 대해서는 14년간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을 평가하고, 법정에 세울 경우 국가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소유예를, 공소시효가 지난 정호용 등 4명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서울지검 조준웅 1차장검사는 12.12가 내란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당시 대통령 등 헌법기관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한 내란죄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제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번 검찰의 결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은 ‘죄는 있지만 역사평가는 후대에 맡기자’는 대통령의 발언에 검찰이 법적 고무도장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이어서 5.18 시위를 획책했던 정동년 등 구속자-부상자-사망자가족 등 3백22명이 주동이 되어 1994.5.13일 오후3시 전두환-노태우 등 5.18 당시 대대장급 이상 신군부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고소장이 접수 된지 1년2개월만인 95년7월18일,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 장윤석)는 피고소피고발인 58명 전원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이들을 불기소 처분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고소인과 피고소인, 참고인 등 모두 2백69명의 진술과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신군부가 취한 행위들은 10.26으로 야기된 권력공백기에 12.12를 통해 군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이라는 새 정권을 창출해내기까지의 전형적인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내란죄 등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마디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죄는 인정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당시 여론은 검찰의 이런 결론을 별 무리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이로써 민주화세력에 의한 역사뒤집기 노력은 일단 서리를 맞는 듯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이변이 발생했다. 1995년10월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한 것이다. 비자금이 1조를 넘을 것이라는 의혹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는 연쇄적 심리작용을 일으켜 군사정권에 대한 사회적 반감으로 비화됐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역사를 뒤집기 하려는 소위 민주화세력에게 절호의 찬스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당시 김영삼은 노태우가 이끄는 민자당에 들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로 인해 김영삼은 소위 민주화세력으로부터 군부와 결탁하여 대통령이 됐다며 조롱받던 처지에 있었다. 바로 이런 때에 노태우의 비자금이 터지자 국민은 노태우와 민자당에 대해 분노했다. 불똥은 노태우에게만 튄 것이 아니라 노태우로부터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도 튀었다. 김대중은 1995년10월25일부터 그달 31일까지 중국 ‘조어대’(영빈관)에 있었다. 비자금 문제가 터지자 김대중은 동행했던 참모들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가 그런 폭로를 한 것은 더 큰 것을 예방하기 위해 던지는 작은 미끼와 같은 것이었다. 만일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의 향방을 추적하게 되면 그가 노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전모가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는 김영삼을 향한 비수도 꽂혀있었다. 당시 민자당에 들어가 노태우 밑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노태우로부터 더 큰 규모의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김대중의 폭로로 당황한 쪽은 김영삼이었다.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면 김영삼은 얼마나 큰돈을 받았겠느냐, 이런 여론이 확산된 것이다. 이 따가운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김영삼은 특유의 승부수를 띄워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그를 향해 집중돼 있는 검은돈의 의혹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노태우와 전두환을 희생양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전직 두 대통령을 희생시키면 전 사회가 충격에 빠질 것이고, 이 충격에 의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세간의 조롱도 묻어 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에게 집중됐던 비자금 수수 여론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따라 1995년11월16일. 노태우가 2,358억 9,6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전격 구속되었고, 11월24일. 김영삼이 5.18특별법을 제정하라 지시함으로써 11월30일에 특별수사본부가 발족되고 정당과 국회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대통령의 발언이 바뀌자 검찰의 입장도 바뀌고 헌법재판소의 권위도 바뀌었다. 이어서 12월3일 전두환이 경남 합천에서 경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어 안양교도소에 구속수감 되었다. “노태우 등 33명의 군부 장교들과 공모하여 대통령의 사전재가 없이 5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육본 중앙청 등을 장악하여 군권을 탈취하였다는 혐의”인 것이다.
 
12월21일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으며, 1996년2월28일에는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종결되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 16명이 기소되었다. 1996년8월26일, 1심 선고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6월을 선고받았고, 12월16일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으며, 1997년4월17일, 상고심은 항소심 형량을 확정하였다. 1997년12월19일,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12월20일에 김영삼과 김대중이 회동하여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사면에 정치적으로 합의했다.
 
이런 약사가 말해주듯이 5.18에 대한 재판은 순전히 김영삼의 상황 돌파 필요성에 의해 시동되었고, 법관들이 인민재판식 여론몰이에 영합하여 판결문을 쓴 정치재판이요, 역사를 뒤집는 역사쿠데타였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학문이다. 분석에 훈련된 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신중하게 써야 하는 것이지, 법을 다루는 법관들이 단기에 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96년의 법관들은 12.12 및 5.18에 대한 역사를 다시 썼다. 법이 학문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법은 광활한 사회 분야 속에서 극히 좁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이 속에 사는 검사들과 법관들은 역사를 쓸 만큼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역사를 조명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영합하는 법관들도 있을 것이고, 분석력과 시각에 제한이 있는 법관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있는 극히 일부의 법관들이 시간에 쫓기면서, 법정에서 쓴 역사를 진실한 역사요 완전한 역사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그 자체가 역사의 연구 대상이지, 역사의 저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보는 10.26
 
1979년10월26일, 오후 4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는 도중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궁정동 안가에서 각하 저녁식사를 준비하라 연락했고, 이때 김재규는 평소 마음먹었던 혁명을 하기 위해 정승화를 궁정동에 불러 대기케 했다. 자기는 각하를 시해할 권총을 준비하고 두 대령들에게는 권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사살하라고 지시한다.
 
차지철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은 이 계획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만찬시간 1시간 40분 만에 김재규는 차지철과 각하를 살해했다. 김계원은 각하의 시신을 국군병원에 옮겨놓고 군의관으로부터 각하가 확실하게 사망했음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비상소집을 한다. 8시40분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으로부터 은밀히 김재규가 차지철과 각하를 살해했다는 정보를 듣고도 각료들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비상국무회의를 열고 익일 아침 4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과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할 것을 결정하고 회의장 밖에 있는 김재규에게 이 사실을 귀띔까지 해주었다. 총리가 이러했으니 다른 국무위원들이야 오죽 눈치를 보았겠는가? 그 많은 국무위원들 가운데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쥐죽은 듯 눈치들만 보았다. 위기에서 국가를 생각하여 나서는 자가 일체 없었던 것이다.   
 
한편 김재규는 시해 후에 피범벅이 돼 가지고 정승화에게 맨발과 와이셔츠 바람으로 달려와 그를 김재규 차에 태우고 육군 b-2 벙커로 갔고, 가는 도중 정승화는 김재규의 말과 표정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는 국방장관을 제치고 장관의 소관사항인 병력을 동원하는 명령을 내리고 차지철의 부하인 경호실 차장을 지휘하여 경호병력을 현장으로 가지 못하도록 동결하는 명령을 내렸고, 현장 접근을 확실히 저지하기 위해 역시 차지철의부하인 수경사령관을 지휘하여 청와대를 포의하라 지시했다. 차지철이 대통령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벙커에 온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동조세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을 내놓으면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약삭바른 배신이었다. 정승화는 장관으로부터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서도 그를 비호했지만 전두환의 순발력에 의해 김재규는 곧바로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고, 거기에서 김재규는 자기가 범인이고 정승화와 함께 행동했다는 것을 털어놨다.
 
이학봉은 즉시 체포하자 했지만 불과 두 시간 정도의 시차로 정승화는 이미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를 비호하고 자신의 개입 사실을 축소하려 갖가지 시도를 했다. 이학봉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구속을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12월 6일에야 구속을 결심했고 d일을 12.12로 결정했다. 판결문에는 전두환이 동경사로 발령 날 것을 눈치 채고 정승화 체포를 결심했다고 하지만 전두환에 대한 인사이야기는 12월9일 골프장에서 노재현과 정승화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이다. 체포하라 결재한 날은 12월6일, 인사발령 이야기는 12월 9일이었다. 판결문이 너무 황당한 것이다.  
 
 다시 보는 12.12
 
12월 12일, 오후 6시30분, 전두환은 수사국장 이학봉을 대동하고 국무총리 공관에서 집무하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 가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당시는 정승화에 대한 의혹이 사회적으로 확산돼 있었고, 이러한 것은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곧바로 대통령에게 가져갔다. 전두환은 재가가 쉽게 나리라 생각하고 무조건 7시에 정승화를 체포하라는 사전각본을 짰다. 그런데 의외에도 최규하는 국방장관을 앉힌 자리에서 재가할 것을 고집했다.
 
정승화를 체포하는 일은 원체 큰일이라 전두환은 평소 군에서 여론을 이끌 수 있는 9명의 장군을 보안사 정문 맞은편에 있는 수경사30단으로 초청하여 재가가 끝나는 대로 체포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승화와 가까운 장태완, 정병주(특전사령관), 김진기(헌병감)에게도 따로 설명해줄 요량으로 신촌만찬을 준비했다.
 
한편 허삼수와 우경윤 등은 4명의 보안사 서빙고 수사관들을 태우고 7시05분에 정승화총장 공관으로 갔다. 서빙고로 가자는 대령들의 권고를 받은 정승화는 순순히 응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부하들과 수사관들 사이에 총격전이 유발됐고 그의 부하들과 범수대 대령이 중상을 입었다. 그 자신이 한 때 보안부대장을 했으면 저항해야 피해만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불필요한 저항을 하다가 부하들을 다치게 한 것이다. 결국 박 수사관이 응접실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m-16소총으로 위협하고서야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한편 국방장관 노재현은 대통령이 빨리 오라는 호출명령을 받고도 이리 저리 피해 다녔고, 피해 다니는 동안 군에는 지휘공백이 발생하여 정승화 군벌과 30단 군벌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됐다. 긴장이 일자 불길한 생각이 든 5명의 장군은 밤 9시 반에 대통령에 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면서 재가를 빨리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대통령은 ‘장관 오면 해줄게’ 하고 담소들을 나누었다.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총장 권한 대행인 윤성민 참모차장 등 수도권 실세들이 나서서 30단에 모인 장군들을 무조건 반란군이라 규정하면서 병력을 동원하고, 30단과 청와대 지역을 전차포와 야포로 융단공격하려 하고, 상대방 장교들을 체포 구금함은 물론 장교들의 이름을 지정하여 사살명령까지 내리고, 대통령을 납치하여 정승화를 구하고, 무장헬기로 정승화를 구출하자는 막다른 단계에까지 이르다가 전두환에 의해 진압되고 체포되기에 이른다. 
 
이리저리 숨어만 다이면서 대통령의 호출에 불응한 노재현은 새벽 1시, 제1공수여단과 국방부 옥상에 배치됐던 수경사 병력 사이에 발생한 총소리에 겁을 먹고 부관과 함께 국방부 건물 지하 1층 어두운 계단에 숨어 있었다. 대통령과 함께 하루 밤을 새운 신현확 총리는 참다못해 자기가 나서서 노재현을 찾아오겠다며 국방부로 향했고, 이에 공수대원들이 국방부 건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새벽 3시50분에 계단 밑에 숨은 장관을 발견한다. 총구를 겨눴던 병사들은 “나 장관이다”하는 말에 경례를 한 후 장관실로 모셔온다. 신현확은 장관과 이희성과 국방차관 김용휴를 태우고 총리공관으로 갔다. 노재현은 보안사에 들려 재가문서에 스스로 결재를 한 후 대통령에 가서 꾸중을 듣고 재가를 얻었다. 4시30분에서 05시 10분 사이였다. 최규하는 서명란에 05:10분이라 쓰고 서명을 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1996-97년에 진행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는 전두환이 죄 없는 정승화를 체포하고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윤성민-장태완이 정승화를 풀어주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 5명의 장군을 보내 대통령을 협박하고, 공관 주변을 경계하는 병사들에 의해 대통령에 겁을 주면서 새벽 5시에 재가를 강요했고, 무단으로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사반란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1996.7.1. 제18회 재판정에 나온 신현확 전 총리는 장군들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건의를 한 후 돌아갔으며, 대통령과 하루 밤을 새우는 동안 공관 경비병을 의식한 적은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12.12가 없었다면 시국은 정승화-김재규가 주도한 쿠데타 세상으로 연결됐을 것이다.  
 
 다시 보는 5.17
 
▲ 광주항쟁     ©브레이크뉴스 자료사진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북한의 남침을 가장 걱정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12월20일에는 남조선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재하지도 않던 ‘신군부’라는 말은 이때 김일성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였다. 4월21일,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다.
 
80년 3월부터 5.18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건,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월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 안보에는 관심조차 없는 3김시대의 정치권과 재야세력으로 불리는 불순세력들은 때가 왔다며 최규하 주도의 과도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몰아치면서 즉시 퇴진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연내에 헌법개정을 마치는 대로 정권을 이양할 것을 수차 약속하면서 재야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학원자유화를 허락했고, 2.29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등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 신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학생세력과 노동자세력을 이끌어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 규모로 확산됐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7일, 제1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전국내각구성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했고, 학생 등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김재규도 김주열이나 김상진 못지않은 애국충신”이라며 과격시위를 선동했다.
 
이어서 김대중은 4.10일, 5.1일, 5.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월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무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전복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남침조건을 마련하도록 해줄 것인가, 아니면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과 이들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조직을 분쇄할 것인가!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 조치였던 것이다.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17 자정을 기해 이른바 김대중 내각을 구상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됐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당시 북한의 위협은 별로 없었으며,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관심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 되는 것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문을 작성했다. 아울러 폭력으로 국무위원들을 협박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국방장관과 국무총리의 계엄지휘권을 배제하고, 바지 같은 대통령을 간접정범으로 이용하여  내란을 했다고 판결했다. 참으로 이해조차 되지 않는 인민재판이요 관심법 재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마디로 김대중이 이끄는 세력은 민주화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이 5월22일 전국소요를 일으킬 수 있도록 가만 두었어야 했다는 판결인 것이다. <제2탄으로 계속> jmw3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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