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 오래 전부터 번창하였고, 항렬자에 ‘서(書)’자 가 있어서 그런지 좋은 책이 많으며, 옛날 어르신부터 지금까지 서책(書冊)을 잘 보여준다.
소 팔아 책 산다는데 팔 소 없어 책 보기 어려운 사람에겐 서슴없이 도서(圖書)를 빌려주는 양반 집안이다. ‘뿌우응…’ 전화를 받으니 주소를 물으며 시집 ‘복사본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곧 『소죽유고(小竹遺稿)』가 우송됐다.▵내면지에 적힌 ‘만흥(漫興:저절로 일어나는 흥취)’은 첫 째 권[건:乾]이고, 만주(晩珠:만년에 주옥같은 시문)는 둘째 권[곤:坤]인데, 후대 누군가가 『소죽유고 건․곤』으로 구분해 표제(標題)를 붙였다. ▵<세재(歲在) 청룡(靑龍)>, 합(合) 186수라 썼고, 여섯 개의 도장 가운데 그 하나가 ‘구시희(具時喜)’. 마침 함께 보낸 쪽지에 ‘소죽 구시희(1852∼1907)’ 선생 가계와 향시장원(鄕試壯元?) 기사가 있어 저자 성함이 확실해 더 한층 반가우며, 보내고 보게 한 증손 정서․정태 두 향우가 무척 고맙다.
▵‘청룡’은 좀 어려운 연대 표기이나 따져보니 1904년 ‘갑진(甲辰:이찬재 글 참고)’이다. 그렇다면 소죽 선생이 돌아가시기(55세) 3년 전 쉰두 살 때 이미 ‘정서’해 두셨음이 확실하고 필사를 마치며 시원해서(?) 그랬는지 유독 큰 글씨로 아호 ‘소죽(小竹)’을 수결했다.
▵책 전편이 7언율과 7언절구로 ‘고산학계(高山學界)’에서 보기 드문 독보적인 문장가·문필가·시인임을 알 수 있다. 겨우 책 몇 장을 넘기며 느낀 이 정도의 판단으로도 3남의 대학자이다. 책 마지막 부분의 ‘흑매(黑梅)’는 매화 그림을 보며 ‘비단 위의 아름다운 미인 자태’라 읊으셨다. 바로 그 앞 ‘우음(偶吟:얼른 떠오른 생각을 읊음)’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다.
“살아오기 50년 터놓고 지낸 친구 적어/두 세 마을 밖 찾아 갈 사람 드물구나./ 우연히 언뜻 나비 좇아 나설 허망한 꿈/ 외로운 학의 무리 새끼들과 빠르게도 날아간다(五十年間知己少:오십년간지기소, 而三村外訪人稀:이삼촌외방인희,偶成槐夢將隨蝶:우성괴몽장수접, 孤鶴翩翩和子飛:고학편편화자비)”. 숙연한 생각이 든다. 시상이 한 번 떠오르면 금방 대여섯 수가 줄줄이 이어 나왔다. 뒷장의 붙임 글 “당장 유학 구시희(堂長幼學具時喜), 계사 십이월 초일일(癸巳十二月初一日), 행현감(行縣監)”이 있다.
여기 계사년(1893)은 선생 41세 때이고, 당장이란 향교 명륜당 책임자로 보인다. 행 현감은 당시 민영운(閔泳雲)이다. 묘한 건 고산면사무소 앞뜰에 ‘민영운불망비’가 있고 이 비석이 많은 의문을 지니게 한다. 선정·선덕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죽 선생은 술도 즐기셨으며, 원래 이름 『소죽집』은 일부를 빼고 행서·해서 매끈한 육필 필사본으로 잊어서는 아니 될 소중한 한문 시문집이다. esc2691@naver.com
*필자: 이승철/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