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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에 빠진 대한불교 조계종단의 무너진 삼보

“사문의 정체성은 계행을 지키고도 자유로운 것이 참 자유다”

강행원 화가 | 기사입력 2018/08/20 [09:51]

한국불교는 다시 나락으로

 

불교가 이 땅에 존립해온 이유는 거의 천 칠백여년 가까운 긴 세월을 우리민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왔던 정신적인 가치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가치 이념이 우리의 민족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 때처럼 불교가 성하면 타락도 따르기 마련이다. 결국 타락으로 인해 조선 불교에서는 억압을 면치 못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성장하고 종교는 박해를 먹고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이렇듯 억압의 이치는 또 다른 성장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불교가 불교다운 가장 찬란한 결실은 조선시대의 억불정치 이념아래서 였다. 그 이념아래서 박해로 만들이진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젔던 성어가 바로 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는 스님들의 호칭에서 유래한다.

 

▲ 강행원 화가.   ©브레이크뉴스

본래의 뜻은 출가 수행자들에 대한 절집안의 호칭으로써 공부만 하는 수행자들을 이판이라 하고, 사찰 살림을 맡아 운영하는 스님들을 사판이라고 하였다. 보편적으로 스님들의 직분을 말할 때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나누어 부르던 명칭이다. 이판사판을 준첩어로 부르던 호칭이 말하듯이, 배불주위 정책에 의한 신분의 마지막 계층으로 전락한 그 극단보다 더한 박해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판사판은 곧 절망감을 내포하는 칭호였다. 좌절을 의미하는 박해의 뜻이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을 가리키는 말로 결국 변해 벼렸다. 이와 같이 극단의 박해에서 영글어진 찬란한 문화가 조선불교였던 것이다. 조선의 가장 하층계급으로 전락한 가운데서 산속으로 쫓겨난 것이 그나마 수행자들에겐 박해를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던 셈이다. 

 

산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땅을 일구어 자급자족 하는 것이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과 공부가 따로 없던 수행정진에 몰두한 결과였다. 그것은 오로지 붓다사관의 수도정진이 가져온 거룩한 연기의 힘이 아닐 수 없다. 붓다의 출가 목적에 대한 그 동기부여는 부귀영화를 버리고 나온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동서남북의 네 문밖에서 확인했던 모양)에 나타난 생로병사를 보게 된 단호한 결심이다. 붓다가 세운 위대한 성취동기는 세속적인 부귀영화와는 다른 영원성을 향한 것이다. 마침내 붓다는 영원한 대웅(大雄)을 성취하여 제자들께 선업을 짓도록 가르침을 전한 교리가 초기경전인 아함경이다. 이 아함경은 5부 아함이 있는데 그중 잡아함을 기초해서 만들어진 명문이 있다.

 

그것이 고려스님 야운 비구께서 저술한 발심자경문의 내용 중에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 이란 문구이다. 이 뜻은 “삼일 닦는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탐내어 쌓은 물건은 하루아침 티끌이 되니라.” 이 뜻은 유독 수행자들께 큰 울림을 주는 글귀로서 사찰 곳곳에 주련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법의를 두른 납자들이 이 글귀의 의미를 되새겨보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인간은 누구나 근본 욕심인 탐욕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나친 욕심은 자신을 망치는 독이라는 의미를 갖게 하는 절대 진리인 성구이다. 조선 불교에서는 출가자들이 억불정책에 갇혀 물욕을 등지고, 하루 수심이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큰 교훈이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이룩한 찬란한 문화유산과 그 정재가 겨우 반세기 남짓 지나면서 온통 분탕질되어 지고 있다. 조계종단 집행부의 감투 사문(沙門)들이 감투싸움으로 혼미를 거듭하며 한국불교는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는 중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철면을 두른 권승으로 또는 요승으로 변한 자들이 때를 지어 오늘을 겨냥해 만든 그 수모의 이판사판, 이 시대의 또 다른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이곳은 외부가 아니라 자신들이 탐물로 성을 쌓아 스스로 공부를 팽개친 사판들의 반세기 전장(戰場)이다. 삼보는 이들로 하여금 무너진 것이다. 수행도 지계도 맑고 추한 것이 모두 뒤엉킨 타락이 따로 없는 그야말로 사바세계의 불집에서 혼돈에 빠져 있다. 이교도나 비 불자 관객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극적인 볼거리는 없다고 비웃는다.

 

이와 같이 붓다의 법은 대한불교 조계종단의 분탕자들 손아귀에서 삼독오욕에 사무친 젯밥이었다. 정법을 짓밟고 삼보를 무너뜨린 권‧요(權‧妖)의 무리들이 종단의 종지를 이끌 수좌들이 공부할 마땅한 도량도 모두 소유하여 내몰았다. 수좌들은 명분상 운영하는 전국에 몇 안 되는 선방을 배회하며, 결제기간 급료를 받고 앉아 있다가 떠나는 거지생활을 하는 것이 요즘 절집안의 진풍경이다. 조선시대와 작금의 수행력 차이는 그때와 같으면 도(道)의 수준은 그 반쯤 되고, 그때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야 겨우 전수가 가능하다. 지금은 돈을 받고 흉내만 내고 있으니 도가 구렁텅에 떨어진 폐도이다. 붓다의 법에 오를 지계의 사다리를 걷어치우는 것 보다 더 큰 해악의 박해는 없다. 지계의 해방을 부추긴 탈 이판이 된 세상으로의 전도는 그대로 오탁악세이다.


조계종단의 그 어처구니들

 

그간의 어처구니들을 돌아보면, 법난을 불러드리고 정권과 유착하고 주색 도박 몰카 은처자 재산축재은익 인격도용 선거분쟁, 등 세속이 상상할 수없는 일들로 타락한 몰골이 현대불교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병적인 박해들을 걷어내야 정법의 바른 공부를 다시 촉진 할 수가 있다. 수행을 목적으로 출가한 불자라면 사판이 하는 일은 절 집안을 운영하는 ‘잡일’에 불과하다. 출가 목적은 당연히 성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한 1962년 이래 총 35대의 총무원장이 재임했지만 이들 가운데 4년 임기를 채우고도 연임을 넘봤던 이가 송월주, 서의현, 이자승 등 세 사람 정도이다. 이와 같이 임기를 마치고도 그 자리를 탐했던 자들과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던 문제의 자들, 그 양자가 다르지 않는 권승(權勝)과 요승(妖僧)들인 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치권력과 세욕의 이권과 무관하지 않는 모든 비리를 불사로 포장한 세력들로 무리지어 다투던 탕자들이다. 법의를 모양으로만 두룬 채 권요를 행하여 붓다의 정법을 박해한 ‘탕자들로 규정’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구업이라 해도 지계가 없는 이들을 삼보로 인정할 수는 없다. 이번 35대 총무원장 설정스님의 사퇴소요는 그의 비리의혹만이 아니라 같은 탕자들의 꼭두각시라는 점이다. 우치하게도 수개월을 버티다 결국 사퇴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뒤집고, 직무를 연기한다는 번복행위의 변은 정말 토악질이 날만큼 도철(饕餮)같은 노욕에 아연했다. 결국 버텨도 종단쇄신에 나선 불자들의 힘에 카멜네온이 된 광장패 종회의원들에 의해 초유의 종회 해임가결로 꼬리 자르기를 당한 욕심의 끝을 보았을 것이다.

 

더 이상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괴물이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들이 흔들어 원장을 만들고, 그들의 노리개로 마땅치가 않아 또 흔들면, 다행으로 생각하고 출가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설조스님의 단식농성과 적폐자 박근혜, 아니 도덕군자 노회찬을 보고도 교훈을 팽개친 성직자의 부끄러움은 입에 담을 수가 없다. 설정 스님에 대한 주요 의혹은 지난해 선거과정부터 터져 나왔던 서울대 학력위조 만으로도 심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기록에 성문화 되어 왔다는 것은 사문서를 위조한 범죄를 넘어 아애 인격을 도용한 파렴치이다. 그 의혹을 본인이 인정한 뒤 사과를 했다지만 이 문제는 사과로 끝날 게제가 아니다. 시골의 이장선거도 학력을 위조 했으면 출마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스님 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이 문제는 사회의 어느 곳이라도 불문곡직하고 국회위원이나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역시 당선을 했더라도 당선무효에 해당한다. 더욱이 성직자가 학력을 속였다면 출마자격을 따지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 4부대중 앞에 참회를 했어야 마땅할 것. 스님다운 행위를 보였다면 다른 불행한 의혹들은 한사코 따라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재산축재와 은처자 의혹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이러한 과보는 “백년탐물일조진/삼일수심천재보”를 되새겨 본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총무원장은 벼슬이 아니고 종단정재를 분탕질 하는 자리일 뿐이다. 출가자가 출가에 대한 성취동기의 목적인 정체성이 분명했다면 그까짓 학력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그런 가식은 출가와는 동떨어진 갈애를 항상 품고 살았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무엇을 그렇게 삼독오욕으로 연연함인가. 성직자의 땅에 떨어진 도덕은 그가 소속된 사회전체에 정신문화를 초토화 시킨 것이다. 부설거사의 게송 중에 “爵位纔高已白頭/ 閻王不怕佩金魚(작위재고기백두/ 염왕불파패금어) 중략, 벼슬길 올랐어도 머리는 백발이라/ 염왕은 벼슬과 영화를 두려워 안나니.” 삭발노승이 얻은 벼슬길, 죽음이 멀지 않는데. 그를 의식할 자는 없다. 노욕의 적패를 끌어내리는 자들이 곧 염왕인데, 물거품 같은 불행한 생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 오히려 징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설정스님이 추한 몰골이 되어 끌려나온 빈자리를 풀어낼 더 큰 문제가 또 기다리고 있다. 원로들이 해야 할 청소는 가장먼저 종회를 해산하는 일이며, 자신들도 스스로 해산해야 한다. 다음의 순서는 민주절차의 직선제를 통해 사령탑을 세워 새로운 정비를 다져나가야 하는 것이 대의이다.
 
법복자체를 믿을 수 가 없는 승단이 되어 4부대중과 함께한 종무행정이 요구되며, 특히 재산 관리는 제가자의 소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 없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듯이 종도 없는 종교도 성립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 이다. 해서 결국 새로운 승단이 태어나게 되려면 사부대중이 합의에 도달하는 불가피한 진통을 반드시 거쳐야 할 촉박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스님행세를 한 철면을 두른 이들은 이미 사람일 수가 없는 괴물이거나 가승들일 뿐, 그들 때문에 환멸을 느낀 일 천만에 이른 불자들이 3백만 이상이 감소했다는 아픈 결과가 오늘의 촉매이기도 한 것이다. 혼미한 이대로 30년 후면 불교가 문을 닫게 될 염려가 없지 않다. 물론 불교의 진리는 인연에 맡기는 것이긴 하지만 지구상에 가장 훌륭한 평등한 가치를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일천칠백여년, 긴 세월을 불교가 지탱해온 우리 정신문화의 가장 큰 유린은 붓다의 정법인 승보가 쓰레기가 되고, 불․법 이보만을 추숭하게 된 아픔일 것이다. 이 아픔은 승단의 책임이며, 회복 또한 승단의 책임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삼독에 빠진 미혹을 42장경에 나오는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겨 봐야한다. 제22장(재물과 색의 해악)에는 "財色之於人, 譬如小兒貪, 刀刃之蜜甜, 不足一食之美, 然有截舌之(재색지어인 비여소아탐도 인지밀첨 부족일식지미 연유제활지)" "재물과 색은 마치 칼날 끝에 묻은 꿀과 같아서 한 번 맛을 들이면 쉽게 끊지 못한다. 재물과 색을 탐하는 것은 마치 어린애가 칼끝에 묻어 있는 꿀을 핥아먹는 것과 같다." 붓다의 말씀은 '사랑'을 '칼날에 묻은 꿀'로 비유하며. 탕자들의 무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자비로운 품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스님들은 거룩한 대웅께 진실로 귀명하여 모든 복지를 제가자들께 맡기고 승단회복과 더불어 생사를 건 영생의 대도를 성취하시길… 합장.  yoonsan47@hanmail.net


*필자/강행원, 화가(동양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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