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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내놓은 '11·15 대책'이 실효를 발휘할 수 있을 지 미지수다. <사진/펜 그리고 자유 db> |
한 마디로 '집 값 광풍'이다. 일주일 사이에 '억' 단위로 집값이 뛰었다는 소리가 들린다. 오르는 집값은 개구리 뱃속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듯 부풀어만 간다. 꼬박꼬박 월급을 저축해가며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우던 직장인들은 한숨만 내쉴 뿐이다.
정부의 말만 믿고 집값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일부 소시민들은 박탈감에 울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다. 지난 15일 정부가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내놓은 대책도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가 대세다. 단기 처방으로 미흡한 점이 많아 치솟는 집값을 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이유에서다.
부동산 '광풍'이 도를 넘어서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상황. 정부가 '집 값 대란'을 막기 위해 또 다시 빼든 칼에 돈 없는 서민들만 피를 흘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불붙은 집 값… 서민들만 울분
"죽도록 일하면 뭐합니까. 차라리 부동산에 매달리는 게 돈 버는 거죠."
서울 서소문 인근에서 정보통신 관련 회사에 근무하던 김동현(가명·36·아현동)은 최근 7년 동안이나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뒀다. 창업이나, 자기계발 등의 이유 때문이 아니다. 단지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뭣하나'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자괴감 빠진 씁쓸한 월급쟁이들
2년 전 김동현의 직장 동료 중 한 명은 경기도 모 지역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사두었다. 그의 직장동료가 아파트를 사둔 지역이 '뉴타운'으로 선정되면서 집값이 3배 가까이 뛰었다. 2억원을 조금 넘게 주고 마련한 아파트는 금세 6억원으로 뛰어 올랐고, 4억원이 넘는 시세 차익을 만지게 됐다.
김동현은 "죽도록 일하면 뭐 하느냐"면서 "1년에 1천만원 모으기도 빠듯한데 집값 뛰었다고 쉽게 몇 억을 버는 동료를 보면서 정말 일할 맛이 안 나더라. 자고나면 '억' 소리나게 집값이 뛰어버리니…. 월급을 아껴가며 저축을 하느니, 차라리 부동산에 매진하는 게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회사를 그만뒀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5년째 배달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상국(가명·35·연신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7천만원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는 그는 최근 턱없이 올라버린 전세값에 애꿎은 담배만 늘어간다. 현재 살고 있는 은평구 연신내 a아파트 전세 계약이 내년 2월로 만료되는데, 최근 전세금이 두 배로 뛰어 올랐다.
한상국은 "전세금은 올려 달라고 하지, 아무리 저금을 해도 집값은 따라잡을 수 없지, 평생 집을 마련하지 못 하겠다"고 하소연했다.
오른 전세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데다, 대출을 받는다 하더라도 내 집 장만이 어렵다고 판단한 한상국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심정을 삭힐 뿐이었다.
최근 '집값 대란'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직장인들이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월급을 모아서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지금처럼 일해서 무엇 하나'라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회사 그만두고 집 보러 다니는 게 남는 장사"
자고나면 '억'… 부동산 광풍에 소시민들 박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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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파트 청약 현장. 최근 '집값대란'이 일자 일부 시민들은 '차라리 부동산에 매달리는 게 돈버는 일'이라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
실제 참여정부 출범 이후 근로자의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약 50여만원 정도 늘었다. 반면 서울 강남구 아파트의 평당 가격은 무려 3천3백여만원으로 94.3%나 올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직장인들은 일손이 잡힐 리가 없다. 대출을 받아서라도 집을 장만하려 했던 직장인들이 "조금만 믿고 기다려 달라"는 정부의 말만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경우도 상당수다.
부동산 서적 불티나게 팔려
그나마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들은 최근 집 값 광풍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
서울 도화동에 위치한 작은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는 이두영(가명·33·도화동)은 1년 전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둔 과천 아파트가 최근 한 달여 만에 4억원이 올라 표정 관리에 애를 먹고 있다.
직장생활 3년째인 김형모(가명·33·공덕동) 역시 지난달 중순 서울 서초구 잠원동 17평형 아파트를 약 4억에 샀다. 대출을 받고 적금을 모두 깼다. 현재 이 집은 2억원 가까이 가격이 뛰었다.
광화문 인근에서 근무하는 한 직장인(36)은 "정부만 믿고 집 구입을 미뤘다가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졌다"면서 "아무리 절약하고 저축해도 집 하나 장만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정부의 부동산대책마저 믿을 수 없으니 서민들은 도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희망도 안보이고 상실감이 너무 크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재테크'에 훨씬 더 신경을 쓰는 사람도 부쩍 늘어나고 있다. 부동산 정보 사이트를 검색하며 시세를 확인하거나, 근무시간에 짬짬이 부동산 공부를 하고 있는 것.
일부 회사에서는 마음이 맞는 동료들을 모아 '소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큰돈이 없는 이들끼리 모여 부동산 시세를 파악하고, 정보를 교환한 뒤 투자를 하는 것이다. 소모임 회원들은 한 마디로 공동투자자인 셈. 회원들은 부동산 투자의 이익을 나눠 갖는다.
부동산 재테크 관련 서적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올해 10월까지 나온 부동산 관련 서적은 9천종으로 지난해 전체 7천종보다 많다. 10월 판매량도 지난해에 비해 30% 늘었다. 이 가운데는 최근까지 10만3천부나 팔린 책도 있다. 부동산 재테크 관련 서적은 기껏해야 3만 부 팔리는 게 고작이었던 것에 비해 이례적인 현상이다.
심리적 압박을 견디다 못한 일부 직장인은 월급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제 '한탕'을 꿈꾸며 회사를 그만두기도 한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의 저축'을 뛰어 넘는 세태는 직장인들의 일할 의욕을 앗아가고 있는 셈이다.
집값 폭등이 중산층에겐 고민과 스트레스를 줬지만, 밑바닥 서민들에겐 깊은 좌절감에 빠지도록 했다. 차라리 내 집 마련의 '꿈'이라도 가진 중산층의 볼멘소리가 소시민들에겐 오히려 '배부른 투정'으로 들린다. 올라도 너무 오른 집값 때문에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서민들은 "집 살 수준이 돼야 스트레스라도 받을 게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정부 11·15 부동산안정화대책 불구 불신감 고조
월급보다 재테크, '부동산 정보 검색' 열풍도…
한 시민은 "집값이 좀 안정되는가 싶어 나름대로 집 장만의 꿈도 가져봤는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가격이 치솟는 통에 이젠 전세에서 월세로 들어갈 판"이라고 자포자기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집값 잡으려다 서민 잡을라
15일 정부가 발표한 '11·15 부동산안정화대책'에 대해서도 서민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11·15 대책'의 골격은 주택공급의 확대, 분양가 인하, 주택담보대출의 규제강화, 서민주택안정 등 네 가지로 요약된다. 규제일변도의 과거 대책과 달리 공급 확대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정했다. '집값 안정이 기대된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기 처방으로 미흡하다', '민간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조기 도입 등 특단 조치가 필요하다'는 등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규제강화는 주택담보 대출을 이용해 사업자금을 조달하는 자영업, 영세기업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는 등 집값 잡으려다 서민 잡는 우(愚)를 범할 우려도 있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11 15 부동산대책'에 따른 집값하락을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추격매수에 나서야 하는지…. 정부는 각종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이번만큼은 믿어 달라"고 호소하지만, 국민들은 "또 발등 찍히는 것 아니냐"고 불신감을 감추지 못한다.
정부의 대책발표 이후 "아파트야 올라라, 뛰어라. 나도 뛴다"며 18층 아파트에서 투신했다는 극한적인 소식은 물론 "어리석은 국민은 또 속아야 하고, 자식들에게 대물림 하지 않으려면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론까지 나온다.
한 시민은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보통의 국민들은 평생 집 장만하는데 허리가 휜다"면서 "아무리 일해서 돈을 모아도 껑충 뛰어오른 집값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소시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은 이미 훨훨 날아간 듯 보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동안 몇 차례 집을 살까 고민도 했지만 정부가 계속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쏟아내기에 기다려 왔다"면서 "정부를 믿었던 내가 바보"라고 한탄했다.
한 회사원은 3억원이 넘는 주택의 경우 담보대출을 규제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월급쟁이들이 유일하게 집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은행 대출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막아버리는 것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번 부동산대책을 놓고 일시적인 가격 안정효과를 기대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문제는 내년 봄 이사철이다. 전세관련 대책이 빠져 있는데다가 내년에는 대통령선거로 개발공약이 남발될 것으로 보인다. 집값이 다시 들썩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내놓은 정책과 무조건 반대로 가야만 돈을 번다"는 한 30대 직장인의 우스갯소리 섞인 푸념을 과연 정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coda03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