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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무기 개발을 위한 미국의 프로그램 (1)

생물 무기 (Biological Warfare Agent) 파헤치기 (8)

예병일 | 기사입력 2003/07/09 [19:55]

생물무기 개발을 위한 노력은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이루어졌지만 정보를 수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또한 알려진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미국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만 소개하겠다.

들어가는 글

▲ 미군의 전쟁모습     ©인터넷이미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육군 의무부대 소령으로 근무하던 레온 폭스는 현대화와 함께 위생개념의 발달로 인하여 생물무기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은 탄저, 야토병(툴라레미아), 페스트, 보툴리즘, 두창, 비저, 장티푸스 등을 포함하여 생물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이미 진행해 왔다.

또한 미국은 1941년부터 1942년 사이에 생물무기에 대한 대대적인 검토를 했고, 1943년에는 생물무기 개발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미국의 생물무기 프로그램은 군사적 목적으로 비밀을 유지하면서 진행되었으며, 1960년대까지 미국 과학자들은 생물무기 개발이 실행 가능한 것이고, 전장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확인하였다.

미국에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시작한 초기의 목적은 미국과 미군을 상대로 한 특정 집단이나 국가의 생물무기 사용을 단념케 하고, 억제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보복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의 프로그램을 통해 공격과 방어에 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후에 생물무기에 대한 강력한 방어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미국은 1970년에 생물무기 사용의 포기를 선언하기까지 효과적인 생물무기에 대한 프로그램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1975년에 생물무기 협약(bwc, biological warfare convention)을 비준하였다. 그러나 bwc 비준과 미국의 포기선언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생물전의 위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의 포기선언도 이제는 휴지가 되어 버린 느낌을 주고 있다.
 
비밀의 생물무기 프로그램

1941년에 국방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미국 과학 아카데미에 생물무기 사용 가능성을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 결과 생물전은 실행될 가능성이 있으며, 생물전에 대하여 미국이 대비책을 세우고, 공격용 생물무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1942년 4월에 스팀슨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정부와 민간조직이 협력하여 생물전을 대비하기 위한 연구기관을 설립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가 루즈벨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육군의 화학담당 부서가 1941년부터 이미 생물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까지 전쟁시에 생물무기가 어떤 효과를 가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2년에 이 계획을 승인하였고, 조지 머크가 책임자로 있던 전쟁예비국(war reserve service)은 연방안정국(federal security agency) 등 담당부서를 설립하였다. 전쟁예비국은 1942년 중반에 20만달러의 자금으로 시작되었으며, 머크의 주도로 하버드와 스탠포드를 포함한 28개 대학교에서 비밀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안정국은 미국 과학 아카데미와 국가 연구 자문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를 포함하는 여러 조직으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전쟁예비국은 미육군의 화학전 담당부대가 생물무기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모든 권리와 능력을 위임받았다. 전쟁예비국보다 더 많은 자금을 바탕으로 1942년과 1943년에 화학무기 담당부서는 새 연구시설 설립에 100만달러를 투자하였다. 여러 곳에 생물무기 연구를 위한 시설이 만들어졌으며, 본부는 1956년에 디트릭 요새(fort detrick)라 이름붙은 매릴랜드의 프레데릭에 있는 디트릭 캠프에 설치되었다. 육군은 또한 인디아나의 테레 하우테 부근에 설비시설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미시시피의 파르카골라에는 2,000 에이커 넓이의 시험장소를 만들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동안 미국이 생물전 연구에 노력한 것은 독일에 대한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일본의 생물전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1942년 봄에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은 생물무기를 보복의 수단으로만 사용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1925년에 발표된 화학무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의 정신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정책이 미국과 영국이 생물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1943년까지 미군 연구시설에는 약 3,800명의 군소속 연구자와 100명의 민간인 연구자가 일을 하게 되었다. 1944년에 유타에 있는 더그웨이 프루빙 그라운드는 미시시피에 있던 것을 대치하여 설립되었고, 생산시설은 인디아나의 테레 하우테 부근에 설치되었다.

미국은 생물무기의 위협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영국 및 캐나다와 정보를 공유하였지만 전쟁이 끝나고 4개월이 지날 때까지 군사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은 미국의 생물무기 프로그램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동안 미국은 기초적으로 탄저병과 보툴리즘에 대한 연구를 주로 진행하였지만 브루셀라증, 앵무새병, 야토병, 비저 등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생물전에 대한 연구가 침체되어 연구용으로만 제한되어 행해졌으며, 인디아나의 생산시설은 상업적 활용을 위하여 화이저 회사에 팔렸다. 비록 고도로 세분화된 프로그램이 초기에는 방어적이었고, 화학무기 프로그램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지만 연구는 차차 독립적으로 진행되면서 영역을 넓혀 나갔다.

비밀계획이 알려지다 
 
▲ 2차세계대전 일본의 731부대  
1937년 이래 일본은 만주에서 인체실험을 포함한 대규모의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연구에 참여했던 일본 과학자들을 특별히 대우하였고, 미국이 특사를 파견하여 얻어 낸 일본의 연구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비밀에 부쳐졌다. 디트릭 캠프에서 온 에드윈 힐과 조셉 빅토르 박사는 1945년에 일본에 가서 22명의 과학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일본인들이 만주에서 고전적인 생물 무기에 대하여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약 1000건 이상의 부검을 실시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부검 대상 대부분은 탄저균에 감염된 사람이었다.

그들은 또한 일본이 400kg이상의 탄저균 포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사용하기 위한 포탄도 특수하게 고안되었다.

1946년 1월, 국방부는 처음으로 미국이 생물무기에 대한 연구와 시험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때 발행된 책에서는 안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에서 실행된 생물 무기에 대한 모든 연구에서는 연구진들이 감염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많은 신기술이 고안되었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모든 관련 군사시설에서 병원과 의무실이 설치되었고, 우연이 발생할 수 있는 감염을 막기 위한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 결과 수년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요할 정도로 생물무기에 감염된 경우는 60회에 불과하였다. 이중 52명은 완전히 회복하였고, 나머지 8명도 만족할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증명된 60케이스 외에 미지의 농도로 생물무기에 노출된 경우가 159회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중 1명만 신속한 치료를 받았고, 감염병으로 발전한 경우는 없었다. 한 예로 생물무기에 노출된 사람이 보고되지 않은 상태에서 질병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치료를 받으면 회복되었다.

전쟁예비국의 머크는 국방부 장관에게 제출한 마지막 보고서에서 그동안 많은 연구업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생물무기의 사용가능성에 대한 완벽한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생물무기 프로그램이 충분한 규모로 계속되어 적절한 방어수준을 유지해야 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1948년에 정부의 연구 프로그램을 관리 감독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던 국방부 산하 연구개발 위원회에서는 생물무기가 파괴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평가를 요청하였다. 생물무기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에서 발행한 볼드윈 보고서(baldwin report)에는 생물무기를 이용한 은밀한 공격에 미국이 특히 취약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현재의 연구와 개발 프로그램은 “특별한 생물무기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체계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요구를 충족시킬만한 권위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볼드윈 보고서에 연구해야 할 내용으로 정리된 것은 1. 생물무기를 탐지하고 식별하는 수단, 2. 오염방지, 보호, 예방, 치료를 위한 개발 방법, 3. 생물무기를 전파하는 방법 등이다.

특별히 추천된 연구방법은 수도, 지하철, 통풍 시설 등을 이용하여 혐오감을 주지 않는 개체를 시험하는 것과 같은 연구 프로그램이었다. 이와 같은 지침은 그 후 20년 동안 계속해서 생물전을 맡은 기구에 영향을 주었고, 미국은 병원성을 가지지 않았다고 믿어지는 생물체나 물질을 이용하여 나라 전체에 걸쳐서 미지의 집단을 대상으로 고도로 세분화된 과학 시험을 계속해서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내용은 1977년에 의회에서 군사적인 생물무기 시험 프로그램이 폭로됨으로써 비밀이 해제되다시피 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생물전 연구 프로그램에서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곡류를 고사시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고, 짧은 기간동안 동물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야전 시험 방법으로 공기중에서 살아있는 생물학 작용제의 효과를 시험하거나 수도시설에 오염시키는 방법이 선택되었다. 미국 중앙정보부에서는 1940년대에 플로리다와 바하마에서 병원성 미생물에 대한 시험을 한 것과 같이 은밀한 프로그램을 진행되었다. 그리고 1949년부터는 병원체에 대한 광범위한 시험을 시작하였다.

1950년에는 생물학 작용제 모조품을 이용한 최초의 공기 중에서의 시험이 버지니아의 놀폭 해안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시행되었다. 뒤를 이어 1953년에 미주리의 세인트루이스와 미네소타의 미네아폴리스에서, 그리고 1966년에는 뉴욕 지하철 노선에도 각종 예비무기에 대한 살포시험이 이루어졌다. 디트릭 캠프에서는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테러와 파괴행위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연구하였고, 종종 주정부 또는 지방정부에 통보조차 하지 않은 채 환경과 관련된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1948년부터 19050년 사이에 화학, 생물학, 방사능 전쟁 프로그램에 관한 연구를 검토하는 위원회에서는 특별한 생물무기 생산 시설을 만들고, 생물학 작용제와 군수품에 대한 지속적인 야전 시험, 포괄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1949년에 디트릭 캠프에 백만리터 크기의 배양기가 만들어지고, 생물무기에 대한 광범위한 시험이 시작되었다. 

1953년에 생물무기에 대한 의학적 연구가 시작되어 화학부대와 의무부대 사이에 협력연구가 진행되었으며, 1954년에는 의학관련 자원봉사자 개발 프로그램이 의회에서 승인되어 설립되었다.

미국에서 실제로 행한 생물무기 시험
 
1950년 6월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생물무기와 관련된 관심을 증가시켰다. 미국 국방부 장관은 1950년 10월에 생물무기 프로그램의 지속을 승인하였으며, 이것은 소련은 물론 북한과 중국의 공산당들이 생물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훗날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들 나라들보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통하여 생물무기에 관한 프로그램을 더 많이 계획하였고, 진행하였다. 물론 1956년에 미래의 전쟁에서 화학 및 생물 무기가 대량살상용으로 사용될 것임을 만천하에 공포한 소련이 생물무기와 관련된 연구나 시험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단지 추측일 뿐이며, 미국이 생물무기를 사용했거나 연구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점점 더 크게 대두되고 있다. (한국 전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에어로졸을 이용한 대규모 살포효과를 미국이 최초로 검사한 것은 1950년 9월이었다.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에서 두 종류의 세균(bacillus globigii, serratia marcescens)과 형광입자를 이용하여 실시하였으며, 탄저균(bacillus anthracis)이 아닌 다른 바실러스 세균도 탄저균처럼 포자를 형성할 수 있다는 유사성으로 인하여 각종 시험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serratia marcescens는 쉽게 식별가능한 빨간 색소를 지니고 있으므로 시험에 흔히 이용된다. 당시의 시험은 그 지역에서 세라티아 감염환자수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사 관계자들은 우연이라고 주장하지만 많은 민간인 의사들은 이것이 시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또한 유타의 더그웨이 프루빙 그라운드에서도 유사한 시험이 진행되었으며, 플로리다의 에글린 공군 기지는 동물에 대한 연구가 행해졌다.

디트릭 캠프의 생물전 연구시설은 확장되었고, 1951년에는 알칸서스의 파인 블러프에도 생물무기 생산시설이 만들어졌다. 제한적으로나마 미국이 생물전에 대한 보복능력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 것은 곡류용 무기폭탄이 개발되고, 시험되고, 미 공군에 배치되면서부터이다. 곡류용 무기 생산을 위한 장소는 미국 농림수산부의 협력과 승인하에 안전을 엄격하게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정되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평화를 위하여 생물무기가 생산되었음을 의미한다.

1954년까지 알칸서스의 연구실에서는 브루셀라증의 원인이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열을 특징으로 하는 (그래서 undulant fever라고도 함) brucellosis suis를 생산하였다. 대인용 생물무기 폭탄은 탄두에 이 균을 채우기 위해서 파인 블러프로 옮겨졌다. 1955년까지 가속화된 프로그램은 생물무기로서 blucellosis suis 외에 야토병의 원인균인 francisella tularensis를 생산했다. 군사연구자들은 물론 공공보건을 담당하는 다른 연구자들, 연방정부의 관련자들, 민간 과학기관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생물전 연구에 임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 진행상황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환경에 대한 연구나 공기 중에서 진행된 연구에 대해서는 특히 모르고 있었다. 1951년에 행해진 환경 시험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콕시디오이도마이코시스에 더 민감하다고 이미 알려진 것처럼 aspergillus fumigatus 곰팡이가 흑인들에게 불균형적으로 많이 감염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이 곰팡이를 노출시키는 실험을 자행하였다. 유사하게 1951년에 버지니아에서도 이 곰핑이에 오염된 바구니에 특정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노출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비밀 정보가 수년 후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자 미국내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미국 정부에 대한 첫 번째 소송은 죽은 사람의 가족에 의한 것으로 1950년 샌프란시스코 실험시 발생한 피해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 법원은 이 실험에서 세균을 사용한 것은 국가 방어 계획의 일부이므로 정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정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시험에 사용되었거나 앞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가지 미생물들이 한 때는 무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훗날 사람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면역 기능이 약화된 사람들은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으므로 불특정인이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20년 동안 생물전과 화학전 연구를 위한 실험실들은 규모를 늘려 갔고, 프로그램은 수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쓸 만큼 팽창하였다. 디트릭 요새의 연구 프로그램은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백신을 만드는 일이 같이 용역계약을 맺은 민간 기관에 의하여 보충됨으로써 q열, 야토병 등과 같은 질병의 예방 백신이 개발되었다.

*다음 원고에서는 미국의 생물무기 프로그램중 방어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루겠다.

[참고자료]
1. 미군 medical research of institute에서 발간한 텍스트북
2. 서재정. 미국과 생물무기. 통일뉴스. 2001. 12. 153. judith miller 외. germs: biological weapons and america's secret war. touchstone books, 2002 (<세균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번역판이 나와 있음)
3. ed regis. the biology of doom: the history of america's secret germ warfare projects. owl books, 2000
4. 미국 질병통제 센터 (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홈페이지. 5. 제6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 학술회의 자료, 2002. 10. 17-20. (여수)
6. donald henderson 외. bioterrorism: guidelines for medical and public health management.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2002
7. stephen endicott, edwar hagermann. 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 secrets from the early cold war and korea. indiana university press, 1999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번역판이 나와 있음)

* 필자는  '의학과 생명과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전문연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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