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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와 반미(反美)감정

공희준 Cinema Jockey | 기사입력 2002/06/08 [11:24]
{image1_left}히딩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히딩크가 독한 마음을 품고 한국에 귀화한 다음 검은 채플린식 콧수염을 붙인 채 대권레이스에 전격적으로 뛰어든다면 히틀러 같은 총통자리조차 수월히 차지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지역과 연령과 계층을 막론하고 이렇듯 고른 지지와 열광적인 성원을 두루 받고 있는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히딩크가 한국 사회에 가장 크게 기여한 공적이라면 월드컵 축구 본선 첫 승이나 16강 진출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데 있다. 폴란드 전의 종료휘슬이 울린 후 온통 붉은 물결로 출렁이는 경기장과 거리를 보며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세대에 속하는 나 역시 조금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붉은 색 일색으로 물든 광장과 도로는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꿈꾸던 광경이 아니었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빨갱이가 되자!"라는 뜻으로 직역 가능한 'be the reds'란 티셔츠를 배포한 곳이 사회주의 계열 정당이나 진보적 노조가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이동통신 재벌기업이란 역설적 현실을 확인하고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잘못 했으면 3.1 운동 직후처럼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포승에 묶여 옥에 갇히는 참사를 목격할 뻔했으니 이 어찌 전율하지 아니할만 하겠는가.

혁명이나 전쟁과 같은 비상시국의 아닌 평온한 시기에 온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었다면 당연히 정부로서는 결집된 국민적 역량을 국가발전과 국운상승의 원동력으로서 생산적으로 승화시킬 방안을 고민해야 할 터이다. 그렇지만 정부의 입장을 공식 대변하는 국정홍보처장이 '반미감정 유포 강력대응' 운운하며 고양된 국민의 자신감과 애국심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개혁작업의 답보와 잇따른 부패스캔들에 실망한 적지 않은 이들이 이민까지 심각하게 고려하는 상황에서 국가대표팀의 선전으로 많은 국민들이 새로운 삶의 활력과 도약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국민들의 기를 살리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고심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라의 융성과 민족중흥의 전환점이 될 중차대한 기로에서, 국민의 정부의 입장을 공식 대변하는 고위 당국자가 직접 나서 서슬 퍼런 유신시대와 폭압적인 5공 시절 기승을 부리던 공안검사들이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을 협박하기 위해 남발하곤 했던 폭언으로 자칫 오해될 우려가 있는 신중하지 못한 언급을 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image2_right}월드컵 한미전을 빌미 삼아 본격적인 반미투쟁을 선동하려는 불순한 세력이 존재한다면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우리 국민은 축구경기 하나의 승패 때문에 심각한 국익의 손실이 따르기 마련인 한미관계의 악화를 초래할 돌출행동을 저지를 만큼 어리석지 않다. 기실 금년 들어 악화한 반미감정은 우리 국민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조성됐기보다는 미국측의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 독주와 외교관행에 어긋난 무례와 오만에 기인한 바 크다. 연초에 있었던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을 시작으로 하여 동계올림픽에서 벌어진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과, 차세대 전투기 사업의 투명하지 못한 선정과정에서 덕수궁 터 미대사관 직원 숙소건립 문제에 이르기까지 나무(한국)는 가만 있는데 계속 바람(미국)이 거칠게 불어와 가지를 마구 흔드는 격이라 하겠다.

상대팀이 미국이든, 북한이든, 일본이든, 그라운드에서 깨끗한 매너와 정정당당한 플레이로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할 때 우리 국민은 비록 다른나라 팀이라도 뜨거운 박수를 보낼 것이다. 황선홍의 감각적인 논스톱 슈팅과 유상철의 대포알 슛에 감탄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미국 선수들의 현란한 발재간과 화려한 개인기에 기꺼이 찬사를 보낼 용의가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월드컵 경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야구와 농구와 미식축구의 나라다. 미국 국가대표 선수들로서도 가슴에 성조기를 달고 오랜만에 관중이 꽉 들어찬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 몹시 기쁘고 보람에 찰 것이다.

나 같은 일개 네티즌이 국민을 중3 수준으로 깔보는 것은 짓궂은 위악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국정홍보처 책임자 정도의 고위관료가 국민을 중3 수준으로 여기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지지부진한 언론개혁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연이은 게이트 정국으로 실추된 국가 이미지를 회복하며, 사상 최저로 예상되는 지방선거 투표율을 제고하는 과업에 전력을 쏟아도 부족한 판국에 국민의 반미감정까지 다스리겠다고 소매를 걷고 나서는 것은 볼썽 사납다.

워렌 비티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빨갱이들(reds)"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생생한 숨결과 현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르포문학의 정수인 '세계를 뒤흔든 10일(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의 저자 존 리드(john leed)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 제목처럼 히딩크 감독은 우리 대표팀을 이끌고 붉은 악마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에 힘입어 월드컵 조별예선 경기가 치러지는 열흘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약속대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월드컵 대회의 열기로 고조되고 싹을 틔운 국민적 성취감과 일체감이 오늘 12월 대선까지 이어지도록 하여 세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하자. 민정계가 똬리를 튼 권문세가와 문벌귀족의 수구정당이든, 국민의 자존심을 북돋기보다 반미감정의 증폭을 억누르는데 더욱 신경을 쓰는 보수적 관료집단이든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분출된 국민적 에너지의 물꼬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자국 출신 감독 덕택에 한국 내에서 국가 브랜드가 상종가에 달한 네덜란드가 우리나라 차세대 구축함 전투체계 선정작업 과정이 미국 방산업체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강력히 어필하고 나선 것이 또 다른 반미감정 악화의 도화선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심히 두려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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